분노조절장애, 뉴스에서 심심찮게 듣는 병명이다. 주요 증상으로는 충동 조절이 어렵고 조절할 수 없는 충동감이다. 우선은 전문적인 병명보다는 분노라는 감정에 시선을 두게 된다. 분노는 말과 행동이 돌발적으로 격렬하게 표현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기쁨, 슬픔 같은 단순하고 일반적인 감정과는 조금 분리되는 극한 감정이다. 가슴속에 과도하게 쌓여 있던 화가 어떤 계기로 인해 잠재돼 있다가 밖으로 과격하게 표출되는 현상이다. 특히 성장 과정에서 정신적 외상이 있을 경우 분노 조절이 더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살다 보면 나 자신은 물론 타인 또는 어떤 상황으로 인해 공격을 받고 마음의 안정감을 잃을 때가 있다. 요즘처럼 혼돈의 혼돈이 격랑 하는 시대에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는 감정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시대다. 때론 사람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됨으로써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일례로 도로에서 앞을 가로막았다는 이유로 공포의 추격전을 벌이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른다. 길을 건너다 무심결에 어깨 한번 부딪혔다고 무차별 폭행을 한다. 층간소음으로 살인까지 한다. 물론 이 세 이유는 직접적인 동기라도 된다지만, 다른 데서 받은 북받
모진 추위와 찬바람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봄의 전령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겨울을 인내한 꽃들이 일제히 아우성치며 앞 다퉈 피어나는 설렘으로 가득한 봄, 더구나 나들이나 여행하기 좋은 기온을 보이는 연둣빛 봄이다. 잘못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탓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부모는 교사의 잘못이나 다른 아이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타인이 잘못을 저지르면 추궁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잘못은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지만, 이혼이 급증하는 것은 양보와 배려보다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한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세상은 자기 사랑이 지나치게 강하다. 인생을 쓴맛, 신맛, 짠맛, 단맛 등의 여러 반찬이 놓인 밥상에 비유하면, 현대인은 단맛의 반찬을 지나치게 좋아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처럼 물질주의가 주는 편리함 뒤에는 수많은 부작용이 있다. 지식의 수준은 높아졌지만 상식적․도덕적 판단력은 너무 부족하고, 인간 사회는 비인간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짓누르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뿐 아니라 단점과 결점
대인관계에 있어서 가장 경계하고 기피해야 할 사람은 말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말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음성기호인 언어이다. 말이 많으면 실속 있는 말은 오히려 적다고 한다. 성인들 말씀에 "입에 재갈을 물리면 목숨을 지키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면 목숨을 잃는다. 어리석은 사람도 잠잠하면 지혜로워 보이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슬기로워 보인다. 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말이 적으면 젊잖아 보이고 인격과 품위가 의젓해 보인다. 다변성이 습관화 된 사람은 떠버리로 취급되어 경박한 사람으로 추락하기 쉽다. 때로는 침묵은 승낙의 표시가 되기도 하고 만병의 약이라고도 한다. 침묵은 현명한 자에게는 충분한 대답이다. 그것은 동의한다는 의미도 있다. 때를 얻은 침묵은 지혜이며 어떠한 웅변보다 낫다. 그래서 인간은 말하는 것을 인간으로부터 배우고, 신(神)으로부터 침묵을 배웠다는 말이 있다. 말수가 적은 사람을 두고 입이 무겁다고 한다. 그런데 노인들이 젊은 사람이나 아낙네들에게 자주 쓰는 말로 촉새같이 잘 나선다는 순수 우리말이 있다. 제가 나설 자리도 아닌데 경망하게 촐랑거리며 참견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시대는 바뀌어도 스승의 역할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하고 사회정의를 위해서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타인에게 모범이 되는 언행을 실천해야 한다. 양심과 사회정의에 반하는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 교육자는 사명감 구현에 보람과 삶의 가치를 느껴야 한다. 과거의 스승은 제자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회발전을 위해 기여해 왔다. 올바른 스승은 어떠한 경우라도 후학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 정결한 외모에 모범적인 언행을 유지해 가야 한다. 악랄했던 일제강점기에서도 스승존경 풍토는 변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승을 존경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었다. 1950~1960년대에는 한 가정에서 5~8명의 자녀를 양육하면서 스승과 부모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라는 교육을 받았다. 부모가 스승의 역할을 하는 사회적 풍토였다. 교사 역시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제자들을 교육시켰다. 해방 후 농경사회의 어려움 속에서도 효도와 사회윤리를 엄격하게 지켜왔다. 스승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도 높았다. 인격의 실체로서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지역사회에서 교사의 역할은 대단했다. 교사는 모든 규범적 가치를 평가하는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남녀구
자식 키우랴, 노후 대비하랴 숨 가쁘게 살아온 날 모두 잊고 좋은 추억만 떠올리며 인생의 가을을 최대한 늘리고 행복한 장수를 위하여 인생의 가을엔 시처럼 살자 인생의 가을은 두 번째 봄이고 세월 나인 70대지만 누구나 마음 나인 50대이다 인생의 가을, 질풍노도는 아니더라도 꽃잎을 흔드는 화창한 봄날의 미풍이고 싶다 김병연 / 시인 · 수필가
우리나라 속담에 "상놈이 가마타면 종(노비)을 앞세우고 싶다 는 말이 있다. 사람은 모두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품위를 지키려는 자존심(自尊心)과 욕심(欲心)이 한결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존심(自尊心)이 없으면 천박해 보이고 사람의 가치가 저하되어 겸손하다고 여기지 않고 무식한 부류의 사람으로 평가받기 쉽다. 자존심(自尊心)은 영국의 격언 자존심은 악마의 정원에 피는 꽃 이란 말처럼 맑은 미덕의 원천이 될 수 있으며, 허영심(虛榮心)은 거의 모든 악덕과 못된 버릇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허영심(虛榮心)은 사람을 수다스럽게 하고 자존심을 침묵하게 한다. 자중자애(自重自愛)란 말 속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중히 여기는 자중은 자기의 언행을 신중하게 한다. 그러면서 또한 자애는 윤리적으로는 자기보존·자기주장의 본능에 따르는 감정으로 제 몸을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다소 지나치면 거만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지지만 인간의 몸을 바로 세우는 데는 반드시 필요한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한 철학자는 "자존심은 어리석은 자가 가지고 다니는 물건 이라고 했지만, 자부심(自負心)은 어떤 일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의 가치나 능력에 대하여 자
꽃들이 윙크하는 봄날 봄바람이 손짓하는 봄날 따뜻한 계절의 봄날 행복한 인생의 봄날 봄날이여! 가지 마라 봄날이여! 가지 마라 김병연 / 시인 · 수필가
제주에서 서울까지 봄꽃이 만발했네 계절도 봄 인생도 봄 봄이여! 영원하라 봄이여! 영원하라 김병연 시인 · 수필가
Y는 스물여덟 살에 결혼하여 스물아홉 살에 딸을 낳고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즘이야 평균 결혼 연령이 남녀 모두 30세가 넘었으니 결혼 참 일찍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남자의 평균 결혼 연령이 스물여섯 살이었으니 결혼이 조금 늦은 것입니다. Y는 사회적으로 남보다 우월하게 아들딸을 키우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 되었습니다. 아들이 돌도 안 돼 뇌막염에 걸려 충남대학교병원에 입원하고 4년여 동안 계속된 아내의 위장병은 의료보험 연간 치료일수 상한인 180일이 가까워지면 한의원에서 치료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뇌막염을 앓은 사람은 반신불수나 저능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Y는 한동안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행히도 후유증이 없었고 총명했습니다. 글자와 숫자를 가르치니 아들딸은 경쟁이라도 하듯 열심히 그리고 잘했다고 합니다. Y의 아내는 아들딸에게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과자를 사주는 대신 매월 용돈을 줬는데, 용돈을 받는 즉시 전액 새마을금고에 저금을 했고 둘이 저금 경쟁을 했습니다. 부모가 시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Y의 아들딸은 경쟁적으로 했고, 다른 아이들이 과자 먹는 것
국어사전은 "평범하다"를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의 삶을 살아왔다. 색다른 점이 없다는 것은 시류에 크게 거스르지 않고 세상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필자나 베이비붐 세대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월세에서 전세로, 또 작지만 내 집을 마련하며 삶의 보금자리를 꾸려왔다. 자식이 성장해 직장에 들어간 뒤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만들도록 힘껏 받쳐주었다. 또 그 자식이 낳은 자식(손자)을 살가워하며 소소한 즐거움에 참으로 행복해했다. 특별할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고 누구나 그렇게 살았다. 물이 흐르는 대로 비바람 치는 대로 묵묵히 삶을 살아낸 것이다. 올해 들어 그렇게도 고대하던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가 열렸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안 먹고 안 입고 부르튼 손발과 굽어진 허리 위에 새겨진 숫자가 아닌가. 필자나 베이비붐 세대들이 일벌레처럼 집과 일터를 오가며 땀과 눈물에 젖은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소득 수준이 이쯤 되면 모두 휘파람을 불 것 같은 환상을 가졌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실상은 온갖 상처들이 켜켜이 쌓여 어떤 처방으로 치유해야 할지 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