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니? 아빠가 일어났다. 나, 진이. 잘 잤어요? 진이가 누구지? 진이가 누구긴요. 아빠 큰 딸이죠. 그냥 어리둥절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않는 아빠. 3년이 지났다. 너무 빠르게 쇠약해져 가는 모습이 눈에 확연하게 보인다. 엄마, 저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일하다 들린거에요. 제가 드린 선물, 저 간 다음에 뜯어보세요. 또 올게요. 그래. 고맙다. 조심히 가렴. 방문이 닫히고 다시 우리 둘만 남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선물을 뜯어 보았다. 일기였다. 진이의 일기. 어리둥절했다. (왜 일기를 내게..) 첫 장을 펴니 김현준, 김민자의 큰 딸로 살아 온 기록입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그게 뭐지? 그가 물었다. 당신 큰 딸이 준 선물이에요. 그렇군. 책장을 닫았다. 아직은 일기를 읽는다는 것이 가슴이 벅찰 거 같았다. 일기는 서랍에 넣어 두고 우린 차를 마셨다. 테이블에서 서로 마주하고 차를 마시는 일은 흔한 일이다. 3년째 이 사람과 똑같은 일상을 지켜가는 나. 오늘은 진이가 준 일기장이 내 일상을 바꾸어 놓는다. 창문 너머 바깥 풍경은 어느새 저녁 노을이 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하얀 들판은 회색빛을 띄며 오늘의 마지막을 마무리 하려
누군가 방문을 노크 한다. 문을 여니 미숙씨가 서 있었다. 따님이 오셨어요. 엄마! 나, 잘 지냈어? 그래.진이구나.들어와. 아빠는? 낮잠 드셨어. 아직 주무시는 중이란다. 진이는 그이에게로 다가간다. 그이랑 가장 많이 닮은 딸. 다른 아이들은 바빠서 자주 못오지만, 큰 딸이라고 자주 들리는 진이. 아빠..나..진이야..일어나.. 진이가 그에게 귓속말로 작게 속삭인다. 주무시게 놔두자. 우리. 나이들면 잠도 많아지니. 참, 엄마, 이거 선물이야. 열어봐. 네가 무슨 선물을? 네 생일인데 네가 선물을 준비했니? 내 생일이니까, 내가 준비했지! 낳아주고 길러준 사람한테 대한 보답!! 고맙구나.감동이네. 엄마 눈이 흔들린다. 내 마음도 쓰라린 감정으로 흔들리고 내려앉는다. 둘이 있으니 외롭지 않고 잘 지낼거란 생각을 처음에 했다. 처음에 이곳을 보러 왔을 땐 안도했다. 생각보다 규모도 크고 깨끗하고 직원들도 많고 친절하고 시설도 좋고. 두 번째로 부모님을 모시고 입주 시켰을 땐, 어디선가에서 끌어 올려져 나오는 슬픔이 내 몸을 휘감았다. 슬픔이라고도 느끼는것조차 부족한 감정. 죄인이 된 거 같았다. 끝까지 보살피고 싶었다. 그러기엔 아빠 상황이 점점 심각해졌다.
햇빛이 구름에 가리워진 오후가 되었다. 우리는 방안에서 각자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다시 침대에 누운 그는,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하며 잠든걸까. 그가 말한 그 남자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키 작고 마르고 하얗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안경 쓰고, 아주 똑똑하고 유머있고 인기가 많은 남자. 4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의 낡은 수첩이 보였다. 5년전 딸이 선물해 준 수첩. 그 속엔 가족, 친구들, 친한 지인들, 거래처, 동료들의 연락처가 빼곡이 담겨 있었다.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이름들을 되새겨봤다. 기억이 날 듯 하다 사라졌다. 각각의 이름들에서 지난 추억들이 짧게 뇌리를 스쳤다. 정민씨 이름이 보였다. 허정민. 모델만큼 키가 크고, 거므스름한 피부에 광대뼈가 있고, 서양적 외모를 가진 잘 생긴 그 사람. 웃을 때 매력을 모조리 내보이는 사람. 몇 년 전 오랜만에 연락했을 때, 그 사람과 내 얘기를 듣고 수화기 안으로 흐느껴 울던 그 사람. 정민씨는 아내를 3년 간 간병하고 있다고 했다. 혈관성치매. 세월이 야속하다고 했다. 매일 매일 고통스럽다고 했다. 우리가 결국 이렇게 되
하얀 빛줄기가 방안을 감쌌다. 한줄기 빛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이 향했다. 작은 탁자에 놓여있는 먹다 만 커피 잔,무심하게 놓인 듯한 반지, 서글프게 보이는 낡은 책장.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들어있는 그를 바라보고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깨운 한줄기 빛은 하얀 커튼 사이로 강렬하게 다시 나를 내리쬔다. 침대에서 발을 띄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얀 커튼을 열고 창 밖을 내다 본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건 하얀 눈이었다. 나지막한 산들과 평화로운 대지들이 하얗게 어우러져 있는. 어느새 작은 사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하얗게 서려있는 창문을 살며시 입김으로 지우며 그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이 곳. 벌써 3년 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 당신과 함께 들어온 이 곳. 더 이상 나의 노래도 할 수 없는,당신도 더 이상 환자를 돌볼 수 없는. 우리 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곳의 아침은 언제나 똑같은 일상을 준다. 아침을 열고 당신을 깨우고 같이 차를 마시고 같이 아침을 먹고, 같이 산책을 하고 같이 책을 읽고, 기억을 순간 순간 잃는 당신에게 세월을 속삭이고, 그리고 다시 어둠에 눈을 감고. 오늘 아
소설 **『형언할 수 없는 (Indescribable)』**는 노년의 부부가 함께 겪는 알츠하이머라는 병과 기억 상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이어지는 깊은 사랑과 정서적 유대를 그려낸 감성적인 작품입니다. 다음은 이 소설에 대한 소개, 감상입니다. 1. 소설 소개 『형언할 수 없는』은 한 요양원에서 지내는 노부부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남편과 그 곁을 지키는 아내, 그리고 그들 곁에서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자녀들의 이야기 속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기억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지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제목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그리움, 외로움, 애정, 죄책감—이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2. 감상 이 소설은 조용히 스며드는 슬픔과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언어는 절제되어 있으나 감정은 절대 얕지 않고, 독자는 마치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그들의 삶을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기억을 잃어가는 남편이 자신을 잃어가는 것조차 모른 채 ‘자신’을 기다리는 장면은 감정의 정점을 찍습니다. 아내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이제 자신도 남편을 알아보지 못할 날이 올 것임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