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르, 지훈!’ 당신의 긴 이야기는 감명 깊게 잘 읽었어요. 저의 긴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셨죠. 제겐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인생이랍니다. 첫눈에 반한 사람과 불같은 사랑을 한 일도 없죠. 프랑스 인근 변두리 시골마을에서 자란 저는, 글자만 간신히 배울 수 있는 가난한 집 네 번째 딸로 태어났어요. 우린 모두 여섯 자매랍니다. 모두 딸이지요. 포도 재배하는 일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큰언니는 집안일에는 뒷전이고, 본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혼자 힘으로 끝까지 공부를 하고, 결국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죠. 우리집의 지식인이자 자랑거리는 큰 언니 밖에 없죠. 우리 아버지는 포도주를 담그는 일, 포도주를 관리하고 맛을 보는 일, 소물리에가 되고 싶어 하셨어요. 하지만 결국 포도 재배하는 일로만 그치셨죠. 어릴 때 아버지에게 왜 소물리에를 안하냐고 여쭤보니, 대답을 안하시더군요. 그냥 포도 재배하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만 하셨죠. 저도 꿈이 있었어요. 큰언니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저는 큰언니처럼 용기도 배짱도 없었기에 포기했죠. 아버지 농사 일을 돕고 어머니 가사 일을 도우며 어느새 20살 성인이 되어 있었어요. 그 무렵 우리
‘친애하는 마들렌’ 오늘 여기는 구름이 가득 찬 회색 하루입니다. 긴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었죠. 쇼팽의 환생이라고 믿는 나였으니까요. 20대 후반에 늦은 나이에 파리에 음대를 들어간다는 건, 모험과도 같은 일이였죠. 내 실력을 자부할 수 없는 나이였으니까요. 어릴때부터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자랐고, 자연스레 피아노가 좋아졌고, 어느 순간부터 피아노를 치고 있었으니까요. 운좋게 파리국립음대에 들어가고 거기서 아내를 만났죠. 청초하고 가녀리고 하얗고 수줍은 20대 초반의 여자. 수줍지만 왠지 도도해보여서 말을 건네기도 어려운 여자. 옷은 항상 트렌드에 맞게 세련된 정장에 머리도 그 시대에 가장 유행하는 스타일로 깔끔하게 꾸미고 다니는 궁금한 여자. 며칠 지나 서양음악사 수업에서 그녀를 발견했죠. 우린 같은 음대에 다니고 있으니, 어떤 수업에서 만나리라 생각했죠.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건 수업시간에 알게됐죠. 운명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가 한국인이라는 행운을요. 나중에 성악전공이라는것도 알게 됐죠. 노래하는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건, 아내를 만나고서부터죠. 클래식 음악을 하는 여자를요. 그녀에게 다가
‘봉주르,마들렌’ 난 지훈, 김이라고 하오. 1945년생이지요. 당신의 편지는 기쁘게 잘 받았소. 난, 50년전쯤 프랑스 파리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던 시기가 있었소. 그곳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있던 내 아내도 만났지요. 나의 파리의 생활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오. 내 아내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았고, 무엇보다도 피아노와 언제나 함께였었기 때문이라오. 할 일 없는 인생의 끝에서 당신과 이렇게 글로 친구를 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쁘오. 마들렌, 당신은 어떤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오? Ji Hoon, Seoul, Korea ‘봉주르, 지훈!’ 오늘은 날씨가 매우 화창하답니다. 햇살이 내리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날씨입니다. 당신의 그곳은 어떤가요? 내 기분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네요. 저번 편지에서 어떤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었었죠? 전 Franz Liszt의 Consolation, No.3을 좋아한답니다. 제목처럼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의 평안과 위안을 얻습니다. 당신도 하루 하루 평안과 위안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피아노 음악은 어떤것인가요? Madelein, Paris, France ‘친애하는 마들렌’ 여
동생과 난 아버지가 좋아하는 뜨거운 홍차를 내왔다. 테이블에 앉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를 바라보며 입을 띄었다. 아빠! 프랑스 다시 가고 싶지 않아? 음, 가고 싶지. 아빠, 프랑스어 다 잊어버린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다시 귀에 들리면 생각나지 않을까? 그래? 그럼, 내가 프랑스 할머니랑 펜팔 할 수 있게 소개해줄까? 이 나이에 무슨.., 아니야! 아빠 한 번 해봐! 내가 도와줄게! 글을 쓸 수 있는 친구가 생기는거자나. 어?, 어? 내 소원이야, 제발! 그래, 생각해볼게. 좋아! 내일까지 생각해! 알겠지? 내일 내가 전화할게! 그래, 알겠다. 아버지 집에서 나오는 길, 동생은 내게 괜한 짓을 한다며 나무랐지만, 난 너무 행복해서 그 즉시 마티유에게 DM을 보냈다. 그리고 그이후, 마들렌이 첫 편지를 먼저 보내왔다. 우린 떨리는 가슴을 움켜 쥐고 소파에 앉아 편지를 조심스레 열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들렌이고, 그녀는 우리 아버지보다 두 살 아래고, 그녀는 4년 전 남편을 병으로 잃었으며, 지금은 멋진 청년과 파리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첫 편지 다운 내용들이 빼곡이 담겨 있었다. 편지를 읽고 있는 아버지의 입가가 미소를
어느날, 마티유에게 특별한, 아니 생소한 그의 일상을 듣게 되었다. 그는 본가에서 독립해 살고 있으며, 살고 있는 곳은 파리의 변두리 지역이며, 알지 못하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흥미롭게 들려 그에게 물어보았다. 어째서 모르는 할머니와 사는지, 프랑스는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해, 고독사에 처하지 않도록 이러한 시스템을 정부에서 구축했다는 것이다. 비싼 파리의 대학을 다니는 가난한 청년들은 집세를 절감하기 위해 홀로 계신 할머니나 할아버지 집에 기숙하며 집세도 아끼고 공부도 하며 돌보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식사도 같이하고, 신문도 읽어 준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 오면 저녁 식사도 같이 하고 산책도 같이 하고 목욕도 시켜 준다고 했다. 난, 마티유에게 물었다. 개인 시간이 부족한거 아니냐고. 하지만, 마티유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했다. 부모님과 보냈던 시간을 떠올려보라고. 고개가 자연스레 끄덕여졌다. 그는 지금의 순간을 젊은 시절 중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될 행복한 과거의 시간이 될것이라고 말했다. 난, 그 순간 뇌리의 스친 것을 그에게 말했다. 마티유와 같이 살고 있는 할머니와 우리 아버지와 펜팔을 할 수 있게
며칠 후, 첫 번째 소설을 완성했다. 너무도 기쁜 마음에 친구들에게, 가족에게 자랑했다. 3년의 모든 상실의 감정들을 실은 나의 첫 소설, 뿌듯했다. 나의 아픔 들을 기쁨으로 보상해 주는 것만 같았다. 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온갖출판사들을 서치 하여 투고하기 시작했다. 공모전에도 모두 참가했다. 2년의 긴 시간 동안. 돌아 온 결과는 모두 참패였다. 힘든 시간이었다. 너무 내 감정에만 서둘렀던 결과이다. 사실, 난 엄마를 급작스럽게 보낸 것에 감정을 모두 소진하고 있었다. 점점 더 깊은 땅 속으로 내려 앉고 있는 감정들을 하나 하나 주워 올려 보상 받으려는. 그렇게 2년이 지나서 모든 걸 내려 놓고, 진실된 감정과 마주하기 시작했던 그때, 아버지가보였다. 가녀려진 눈과, 색바랜 입술과, 무표정한 얼굴과, 어수룩한 말과, 가누기 힘든 다리와. 어둠으로 끌려가는 아버지의 형체와.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아빠 생신인 거 알지?어. 음식 만들어야 하니까 일찍 와. 어. 행복해야만 하는 날이다. 난 아버지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불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설명해드리려고 한다. 난, 1년전 소셜미디어를 통해 한 프랑스 청년을 알게 되었다. 우린 같
나는 하루 종일 원고와 씨름 하다 문득 울리는 핸드폰을 열었다. 아버지였다.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첫 번째 소설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끊어지는 게 싫었다.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요? 아빠? 진아, 오늘 엄마 9번째 기일인 거 알고 있지? 잊고 있었다. 세월 탓을 했다. 네..그럼요.. 집에 일찍 오거라. 네. 그때 봐요. 아빠. 마음 한 켠이 뒤죽박죽 내려 앉고 있었다. 쓰고 있던 소설의 맨 마지막 장이, 순간 펜을 멈추게 만들었다. 아.., 왜, 지금 이 순간에.., 그때, 우리집 고양이 미미가 내 손등 위로 올라 앉았다. 잡고 있던 커피가 내 허벅지로쏟아졌다. 미미! 이게 무슨 짓이야!’괜히 고양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햇살이 내리 쬐고 있는 바지를 보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다 문득 한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입던 바지이다. 병환으로 옷 입는 거마저 입기 힘들어했던, 매일 같은 옷만 입고 있었던, 그 바지이다. 순간 나의 냉혹함과 무관심을 비난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서둘러 옷을 갈아 입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에게로. 엄마가 돌아가신 지 3년이 흘렀다. 난, 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단했던 먼 길을 돌고 돌아 한 줌의 재가 되어 내 눈 앞에 뿌려졌다. 그날 저녁,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뒤로 한 채, 홀로 거실에서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낡은 피아노와 마주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왈칵 쏟아졌다. 세월의 무게만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들이 이 방을 뒤덮으며, 추억의환상들을 꺼집어 내고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나를 낳는 엄마의 모습, 나를 사랑해 주는 모든 순간들, 내 곁에서 사라져간 엄마의 그날. 그리고 지금.. 10년만의 헤어짐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모든 것들 중., 가장 큰 고통의 순간에 또 다시 서 있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 할 수 있는 문제라,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세 번째 거절이다. 난, 요 몇 년 동안 고독사에 처한 사람들을 탐문하며,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도덕적으로 인정 되지 않는 안락사도 취재하고 있었다. 쉽게 연구하며 내린 결정은 아니다. 아버지의 피아노의 앞에 다시 서 봤다. 그리고 천천히 조용히 앉았다. 아버지의 숨결,엄마와의 추억, 그리고 죽음..., 마들렌이라고 쓰여
『마들렌에게서 온 편지』는 기억, 사랑, 상실, 용서,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한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입니다. 주인공(진)은 아버지와 프랑스의 한 노년 여성(마들렌)이 펜팔을 하면서 서로의 외로움을 위로하고, 지난 삶의 회한과 후회를 나누는 과정을 그려낸다. 작품은 아버지의 죽음, 마들렌의 죽음, 그리고 주인공의 성장을 중심으로 감정의 흐름을 서서히 고조시킵니다. 특징적인 요소: • 노년의 사랑과 인간적인 교감 • 가족 간의 관계와 세대 간의 소통 • 기억과 망각, 치유와 용서 • 편지 형식의 서사 활용 •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문체 2. 테마 및 주요 메시지 ① 기억과 망각 • 아버지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마들렌은 병으로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한다. • 마들렌이 아버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아버지의 기억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위안이었다. • 결국,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사랑과 유대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② 사랑과 용서 • 아버지는 젊은 시절 아내를 소홀히 하고, 외로움을 느끼던 시기에 다른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 아내가 떠난 후 그는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살아가지만, 마들렌과의 편지를 통해 조금씩 마
일기장을 덮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하얀 얼굴, 하얀 발, 지금 막 태어난 신생아 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거 같았다. 그이 곁으로 가서 눕는다. 그 옆에 바싹 붙어 누워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당신, 그거 알아요? 당신은 내게 형언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요. 내게 사랑을 주었고, 아이들을 주었고, 행복을 주었어요. 거기에 우리는 같은 병을 앓고 있어요. 이거 또한 신의 축복이겠죠. 당신이 먼저 떠나면,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내가 먼저 떠나면 당신은 나를 어떻게 든 찾아낼 거니까요. 그런데도, 마지막 소망이 있어요. 이렇게 둘이 한 날에 같이 떠나는 걸 소망 해요. 사실 당신이 내게 고백했던 날, 나도 당신에게 고백하려 했었거든요. 의대생인데도 교회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멋지게 치던 당신의 모습에 반했었거든요. 우리는 같이 시작했던 거에요. 같이 시작했기에 같이 떠나야만 해요. 이 모든 기억들이 지워지기 전에 당신과 같이 떠나기를 기도해요. 당신의 얼굴과 미소와 목소리를 잊어버리기전에요. 그래야 당신이 나를 잃어도 내가 당신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당신을 찾으면 다 얘기해줄게요. 당신이 나의 형언할 수 없
다음날, 여느 때처럼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방 안 한기가 코끝까지 전해졌다. 방이 원래 이렇게 추웠었나. 몸을 간신히 일으키고 장롱을 열어 겨울 가운을 꺼내 입었다. 뜨거운 차가 생각났다. 전기 포트에 생수를 붓고 전기 코드를 콘센트에 꽂았다. 물이 끓는 동안 창 밖을 보았다. 언제나 똑같은 풍경, 하얀 들판, 하얀 소나무들, 하얀 벤치, 하얀 사슴들, 하얀 나비.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전기 포트 뚜껑을 열고 찻잔에 붓는다. 보이차 티백을 넣고 우러나오길 기다린다. 저번에 읽다가 덮어두었던 진이의 일기장이 생각났다. 서랍에서 진이의 일기장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했다. 2004년 아빠가 위암 수술을 하셨다. 다행히 초기였지만 위를 다 절제하셨다. 그 여파로 몸무게가 15키로나 빠지셨다. 아픈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빠곁을 지키고 있는 엄마. 내 생애의 처음 겪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2014년 10년 동안 암 정기 검진 소견에서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받으셨다. 가족 모두가 기뻐했다. 2018년 아빠의 상태가 이상하다.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깔끔한 사람이 택시에 난생 처음 코트와 지갑을 두고 내렸다. 며칠 후, 또 다른 택시 기사가 아빠 전화기로 내게 전화했다
의사 선생님과 마주 보고 앉았다. 선생님.. 더 나빠진 건가요?.. 음..네..그렇습니다..안타깝게도.. 그 사람 얼마나 남은 건데요?.. 아니요..민자님이..더..나빠지신 상태입니다.. 아..그렇군요..알겠습니다.. 부탁이 있어요. 선생님. 네. 말씀해보세요. 제가 먼저 떠나게 된다면, 그이에게 저의 부재는 알리지 말아주세요. 여행을 잠시 떠난 거라고 말씀해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 기억 속에 저는 사라져 있는 존재가 되어 있을 테니까요. 저를 영영 잃을 테니까요. 네. 그러죠.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로 상담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니 처음 보는 광경이 내 눈을 의심케 했다. 그이가 창문 앞에 서 있다. 당신, 어떻게 혼자 일어났어요? 음, 당연히 혼자 일어나지. 어디 갔다 왔어? 아..잠깐 로비에서..미숙씨와 얘기하고 왔어요.. 그랬군, 그런데 당신 그거 알아? 어떤 거요? 무슨 궁금한 거 생겼어요? 어, 그 사람 말이야. 내가 기다리는 그 사람. 아..그 사람이요..그런데요? 나는 그 사람이 너무 그립기도 하고 만나고 싶고 기다려지는데, 그 사람은 내게 전화 한번도 안하고 찾아오지도 않는 걸까? 왜 그렇게 그 사람을 기다리는데요?
안녕하셨어요. 잘 지내고 계시죠?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오늘은 정기 검진이 있는 날입니다. 남편분부터 검사실로 이동하죠. 말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양말을 신으려는 그. 도우미들이 그의 양말 신는 걸 도와주고 신발을 신기고, 휠체어에 앉혀 방에서 나가고. 민자님도 준비 해주시구요.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현실은 이런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이런 것이다. 언제 기억을 다 잃는 날이 오는 것을, 언제 우리가 서로 알아보지 못할 날이 오는 것을, 언제 우리가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을. 그이가 먼저 방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방에서 옷을 다시 갈아 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때, 방 안 전화기가 울렸다. 간호사였다. 1시간 후에 주치의 상담실에서 상담이 있을 거라고 하였다. 도우미가 그전에 와서 같이 동행해 줄거라고 하였다. 가슴이 떨려 왔다.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누워 있는 그. 잠이 무척 많이 늘은 요즈음. 당신이 조금만 버텨준다면, 아니 내가 더 버텨준다면, 당신을 먼저 잃는 일은 없을 텐 데. 내가 먼저 떠나면, 당신은 나를 찾지 못하고 잃을 테니. 김별 | 글